냉전이 발생하였다고 보고 소련의 지정학적 팽창정책에서 냉전이 기인한다고 본다. 이와는 달리 Williams, Aperovitz, Kolko, Horowitz 등으로 대변되는 수정주의 역사학(revisionist historian)은 전후 소련은 세계지배나 적화야욕의 의도도 없었거니와 능력도 없었으나,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소련이 확보
한국 전쟁 중 미국은 소련과 중국을 배재한 채 일본과 평화조약과 함께 미일군사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동북아 지역을 미국과 소련의 양 진영으로 확연하게 경계지으며 냉전체제를 고착시켰다.
결국 한반도는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국가지도자들은 어떤 대외정책을 결정할 때 그 결정이
1. 대한민국의 수립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세계
1) 냉전체제의 성립
자유주의 진영
(미국 중심)
트루먼독트린
북대서양 조약 기구공산주의 진영
(소련 중심)
베를린 봉쇄
바르샤바 조약 기구6․25 전쟁
쿠바 위기
베트남 전쟁제3 세계
반둥회의(1955)에서 평화 10 원칙 발표 → 강대국에 의한
비판 없이 그대로 수용되었고, 그 상태에서 20세기 전반의 우리 역사가 흘러갔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근대시기에 대해 말할 때, 서구화와 식민지화라는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까닭에 한국에서 근대의 기점을 언제로 잡을 것인가를 두고 학자 들 간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서론 : 장미는 ‘절대로’쓰레기통에서 피지 않는다.
[5.18]
광주를 생각나게 하는 그 날은 또다시 지나갔다. 새삼스러이 광주에서 일어났던 참상들을 되새김질했던 언론은 전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광주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축제가 끝나면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지는 축제 의상처럼 광주는 다시 역사
북한의 사주를 밭아 국가전복을 꾀하는’자들로 둔갑시켜 처형시켰다. 마지막으로 녹화 사업 역시‘적화 사상’으 로 물든 학생들의 사상을 푸르게 녹화시킨다는 명분 하에 시작된 것이었다.
삼대를 내려온 이 공통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남한을 점령한 붉은 역병, 한국적 매카시즘이 국가폭
뒤 대립하게 된 미국과 소련, 그리고 그 속에서 펼쳐진 동아시아 사회주의 세력과 미국을 포함한 자본주의 세력의 대립이 존재했다. 이런 대립은 1947년 이후 더욱 깊어졌고 계기만 있다면 언제든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었다.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이 선언되고 난 뒤 냉전은 본
지도자를 선택하여 그들의 성향과 특징을 조사하고 어떻게 한미동맹 관계가 변화하고 있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둘째, 약소국인 한국 사회의 대미관에 대한 정서를 연대별로 조사하고 그것이 한미동맹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볼 것이다.
셋째, 국제체제의 변화를 냉전시대 전후와 이후에 9
미국 수뇌부는 전쟁 발발 직후 일주일 동안 1, 2차 블레어하우스 회의, 1, 2차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백악관회의 등을 거쳐 한국전쟁의 기본개념을 ‘제한전’으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맥아더는 장개석과 이승만의 북진론을 기반으로 반공전선을 동북아 지역 전체로 확대하고자 했다. 결국 이러한 대립
나치당의 당세는 크게 신장되었다. 특히 1932년 1월 27일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히틀러와 대자본가들의 회담은 나치와 독일 지배세력의 결합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히틀러는 1932년 3월 13일의 대통령선거에서 31.1%, 4월 11일의 결선투표에서는 36.8%의 지지를 얻었으나, 힌덴부르크에게 패배했다.